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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할머니의 나무십자가

by stella.bright 2020.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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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침대 머리맡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꽤 큼직한 십자가가 놓여있다.

 

어릴 때 나를 키워주신 우리 외할머니의 십자가.

투박하지만 손때 묻은 할머니의 유산.

 

성인 여성의 상체만 한 꽤 큼지막한 십자가는 

30-40년 동안 할머니 집의 벽에 걸려 

한 동안은 어머니의 걱정 어린 자식들의 기도를

한 동안은 손주들의 건강과 안녕을 바라는

할머니의 기도를 차곡차곡 쌓았을 것이라...

 

독실한 신자였던 할머니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걱정과 위로와 희망과 소원을 

십자가에 담았으리라...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3개월 남짓.

어릴 때 나를 키워주셔서

다른 손주들보다 나를 많이 아끼시던

할머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십자가.

 

나는 독실한 신자도 아니고,

성당이나 교회를 주기적으로 나가는 사람도 아니지만,

할머니의 희로애락과 인생의 이야기가 담겨 있을

십자가를 머리맡에 두고 누워 매일 잠을 청한다.

 

가끔 침대에 누워 할머니에게 말을 건다.

할머니가 그랬을 것처럼

나의 걱정, 소원, 희망, 슬픔, 기쁨을 

십자가에게 나눈다.

 


엄마와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

할머니 이야기가 나왔다.

 

이 넓은 세계에서,

평생을 좁은 한국이 전부인 줄 알다가

떠나간 사람.

아내로서, 엄마로서, 할머니로서

평생을 살다가 떠나간 사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마지막 가는 길조차 쓸쓸했을 사람.

 

'그 시절에는 다 그랬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너무나 많은 인생의 굴곡을 경험해야 했던

우리 할머니.

 

그녀의 인생이 행복했다 말할 수 있을까?

그녀의 삶이 아름다웠다 말할 수 있을까?

 

다만 나는 바라본다.

그녀의 슬픔이 깊지 않았기를,

그녀의 시련이 너무 시리지만은 않았기를.

 

그녀의 삶이 남긴 legacy가 헛되지 않기를.

그녀의 삶이 뿌린 씨앗이 위대한 유산으로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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